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난창 폭동 (문단 편집) === 봉기의 실패 === 공산군이 산터우를 점령하자 새 중앙정치국 위원 장타이레이가 홍콩을 경유하여 산터우에 도착했다. 저우언라이는 장타이레이가 북벌을 위한 무기를 가져왔다고 여겨 크게 반겼으나 장타이레이가 가져온 소식은 그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었다. 장타이레이는 스탈린이 9월 19일, 국민당 혁명위원회라는 적당주의 간판을 내리고 중화 소비에트로 개칭할 것이며 산터우와 조주를 버리고 군대를 해풍, 육풍 지구로 이동시켜 농민과 합류, 노농홍군으로 개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알렸다. 또한 저우언라이와 장궈타오는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강등당하고 담평산과 리리싼이 정치국 위원에서 파면되었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장궈타오와 리리싼은 상하이로 돌아가고 혁명위원회는 해체하며 담평산도 부서를 떠나고 군사는 저우언라이의 책임 아래에 둔다는 것이 중앙의 결정이었다. 당혹한 저우언라이는 장타이레이에게 말했다. >"이러한 일에 대해선 신중하게 논의하기로 합시다. 해풍, 육풍으로 가려해도 멀리 탕갱의 국민당군을 격파하지 않고는 갈 수 없으니 일체의 개혁은 이 전투를 끝낸 후에 할 수 밖에 없습니다." 1927년 9월 30일 리지천이 지휘하는 국민혁명군이 산터우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주사제의 25사단은 전대조가 지휘하는 국민혁명군에게 분산되어 있었고 허룽의 2군은 순풍에 있어서 공산군은 예팅 휘하의 24사단, 5천명의 부대만 가지고 대응할 수 있었다. 국민혁명군은 그 4배가 넘는 2만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유리한 지역을 이미 선점하고 있었다. 결국 10월 3일의 탕갱 전투[* 혹은 게양 전투.]에서 공산군은 2천명 이상을 잃고 참패했고 패주 길에 올랐다. 말라리아를 앓고 있던 저우언라이는 결국 병세가 악화되어 쓰러져 들것에 실려 이동했다. 10월 4일, 저우언라이가 유사의 한 교회에서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여러분은 아직 여기 있습니까? 지금 중앙의 지시에 따라 우리 공산당은 중국 국민당의 깃발을 사용치 않고 중화 소비에트 깃발 아래서 단독행동을 하기로 했습니다. 지금 이후로 중국 국민당 혁명위원회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중에서 부대를 떠나고 싶은 사람은 여기서 헤어집시다." 이로 인하여 공산군 중 공산당원이 아닌 사람들이 떨어져 나갔고 잔류한 공산군은 산터우 서남쪽 160킬로미터 지점의 해륙풍 지역으로 철수하면서 난창 폭동은 실질적으로 종결되었다. 저우언라이는 팽배가 해륙풍 소비에트를 건설한 해륙풍 지역에서 농민의 지원을 기대했으나 국민혁명군 11사단의 반격으로 붕괴 상태에 이르렀다. 이 시점에서 주더와 천이는 남하를 포기하고 마오쩌둥의 정강산으로 이동했고 말라리아에 걸려 쓰러진 저우언라이는 섭영진과 예팅의 도움을 받아 홍콩으로 보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